사람들은 아쉬웠던 지난 날을 회상하며 반대상황을 가정해보곤 한다.
내가 만약에 학창시절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내가 만약에 그녀에게 용기 있게 고백했더라면,
내가 만약에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등등.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스포츠 세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아니 어쩌면 이런 가정은 한 순간의 실수로 결과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은 스포츠에서 더 많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32일간의 대장정을 마친 브라질 월드컵을 '만약에'로 정리해 보는 시간을.
물론 가정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은 1무 2패, 독일은 우승했다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2014년 1월 22일, 만약에 팔카오가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월드컵을 5개월여 앞둔 지난 1월 22일, 콜롬비아 국민들은 슬픔에 잠겼다. 콜롬비아 축구의 자랑이자 유럽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로 꼽히는 라다멜 팔카오가 경기 도중 상대 수비수의 태클로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부상 이후 팔카오는 월드컵을 뛰기 힘들 것이라는 의사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참가에 대한 의지를 계속 불태웠다. 하지만 부상 회복에 실패하고 결국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하며 4년 뒤를 기약해야만 했다.
팔카오의 엔트리 탈락으로 험난한 월드컵이 예상됐던 콜롬비아는 에이스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하며 8강에 오르는 돌풍을 보여줬다. 특히 신성 하메스 로드리게스는 팔카오의 공백마저 잊게 만들며 브라질 월드컵 골든슈를 차지했다. 만약 로드리게스와 더불어 팔카오까지 같이 뛰었다면 콜롬비아는 8강을 넘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지 않았을까?
2014년 2월 28일, 만약에 코스타가 스페인으로 귀화를 하지 않았다면?
디에고 코스타는 2013년 3월 22일 브라질 유니폼을 입고 A매치에 데뷔했다. 하지만 6개월 후 그는 스페인 대표팀에서 뛰기를 희망했고, 결국 FIFA의 승인을 받아 스페인 국가대표팀으로 뛸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 이듬해인 2014년 2월 28일, 코스타는 자신이 브라질 유니폼을 입고 데뷔전을 치렀던 이탈리아를 상대로 이번엔 스페인 유니폼을 입고 데뷔전을 치렀다.
월드컵이 개막하기 전만 하더라도 코스타의 귀화는 스페인에게 위력적인 공격 옵션이 추가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네덜란드전과 칠레전에서 충격적인 연패를 기록하며 스페인이 탈락하자, 모든 비난의 화살은 원톱 코스타에게 집중됐다. 결국 코스타는 조별 예선 최종전이었던 호주와의 경기에서 벤치를 지켰고, 코스타 대신 선발 출전한 비야와 토레스는 득점을 기록하는데 성공했다.
이번 대회에서 브라질은 부동의 원톱 프레드의 부진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만약 코스타가 스페인으로 귀화하지 않고 계속 브라질 국가대표팀으로 뛰었다면, 브라질은 마라카낭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2014년 3월 6일, 만약에 박주영이 그리스전에서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면?
아스날에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던 박주영은 이적시장 마감 직전 왓포드로 극적 임대를 떠났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박주영의 국가대표팀 발탁론 또한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박주영은 왓포드로 임대된 후에도 주전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단 두 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명보 감독은 국내파 공격진들의 부진을 이유로 박주영을 그리스와의 평가전 엔트리에 포함시킨다.
박주영은 이 경기에서 선발출전하여 전반 18분 손흥민의 패스를 받아 2년만의 A매치 득점포를 가동했다. 이 골로 박주영은 많은 언론과 팬들에게 ‘역시 박주영’ 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부상과 황제훈련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박주영은 월드컵 직전 열린 두 차례의 평가전에서 모두 선발출전하고도 무득점에 그치며 많은 팬들의 우려를 자아냈지만 홍명보 감독은 그를 러시아전과 알제리전에 선발로 기용했다. 결과는 2경기 0슈팅으로 원톱으로서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으며, 경기 도중 나온 제스처로 ‘1따봉’ 과 ‘1미안’ 이라는 웃지 못할 기록마저 얻었다.
반면 박주영 대신 투입됐던 이근호와 김신욱은 많지 않은 출전 시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전과 벨기에전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만약 박주영이 그리스전에서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이근호와 김신욱의 슈퍼플레이를 조금 더 일찍 보게 됐을지도 모른다.
2014년 6월 13일, 만약에 브라질에게 PK가 선언되지 않았다면?
6월 13일 (현지 시각으론 12일), 아레나 데 상파울루에서 4년간 기다렸던 월드컵의 막을 올렸다. 개최국이자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던 브라질과 개막전에서 붙게 된 상대는 크로아티아였다. 크로아티아는 브라질을 상대로 수비적으로 나올거란 예상과는 달리 공격적으로 나서며 대등한 경기양상을 보여줬다.
그러던 전반 11분 좌측에서 올리치가 올린 크로스가 마르셀로를 맞고 들어가며 선제골을 기록하는데 성공한다. 비록 전반 막판 네이마르에게 동점골을 허용하긴 했지만 크로아티아는 후반 들어서도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 무승부라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후반 25분, 페널티 박스 안에서 프레드를 마크하던 로브렌에게 파울이 주어지며 PK가 선언된다. 크로아티아 선수들은 잘못된 ?판정이라며 주심에게 항의했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고 결국 네이마르가 PK를 깔끔하게 성공시키며 2:1로 브라질이 앞서나갔다. 동점을 만들기 위해 라인을 올리던 크로아티아는 종료 직전 오스카에게 쐐기골을 허용하며 결국 3:1로 패배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브라질은 이 경기를 이기지 못했다면 멕시코에 이어 A조 2위로 16강에 올랐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됐다면 그들은 16강에서 B조 1위였던 네덜란드를 상대하게 됐을 것이다. 그들의 12년만에 우승 도전이 16강에서 멈출 수도 있었던 것이다.
2014년 6월 17일, 만약에 페페가 뮐러에게 박치기를 하지 않았다면?
6월 17일, 아레나 폰테 노바에서는 유럽의 강호들인 포르투갈과 독일이 맞붙었다. 박빙의 승부가 예상됐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포르투갈은 독일의 상대가 안됐다. ?독일은 우승후보답게 30여분만에 호날두의 포르투갈에게 2:0으로 앞서나가는데 성공했다.
그러던 중 전반 36분경, 뮐러의 돌파를 막던 페페가 뮐러가 넘어지자 그에게 다가가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듯 하더니 자신의 머리를 뮐러의 머리에다 박아버리고 말았다. 바로 옆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주심은 즉시 페페에게 빨간 카드를 보여줬다. 결국 수비의 핵이었던 페페가 빠진 포르투갈은 후반전에도 두골을 실점하며 4:0이라는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페페의 이 퇴장은 단순히 독일전 한 경기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미국전에서도 페페가 없는 수비에서의 문제를 드러내며 두골을 허용했다. 최종전인 가나전에서는 페페가 복귀했고, 2대1로 승리했지만, 미국에게 득실차로 밀리며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만약 페페가 어리석은 행동으로 퇴장당하지 않았다면 포르투갈은 두 대회 연속 조별리그 탈락을 경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2014년 6월 22일, 만약에 제코의 골이 취소되지 않았다면?
보스니아는 조별리그 1차전이자, 자신들의 월드컵 첫경기였던 아르헨티나전에서 대등한 경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의 활약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들이 16강을 가기 위해서는 2차전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승리해야만 했다. 경기가 시작되자 그들은 나이지리아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전반 20분, 미시모비치의 환상적인 스루패스를 받은 제코는 그 골찬스를 놓치지 않고 나이지리아의 골망을 흔들었지만 부심은 오프사이드기를 올리고 있었다. 오프사이드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던 제코는 즉각적으로 항의에 나섰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제코의 억울함을 대변하듯 TV에서 오프사이드가 아니라는 리플레이가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을 뿐.
10분이 채 지나지않아 보스니아는 나이지리아의 오뎀윙기에게 실점했다. 이 장면에서도 오뎀윙기가 파울을 했다며 보스니아 선수들이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보스니아는 제코의 종료 직전 회심의 왼발슛마저 엔에야마 키퍼의 선방에 이어 골대를 강타하는 불운과 함께 0:1로 석패하며 16강 진출의 꿈을 다음으로 미뤄야했다.
만약 보스니아가 이 경기를 승리, 아니 무승부만 거뒀더라도 16강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보스니아는 최종전에서 조별리그 최약체로 꼽히던 이란과 붙는 반면에, 나이지리아는 메시의 아르헨티나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2014년 6월 25일, 만약에 수아레즈에게 퇴장이 주어졌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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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월드컵에서 4위를 기록했던 우루과이는 수아레즈가 결장한 코스타리카와의 첫경기에서 1:3으로 충격패를 당하며 체면을 구겼다. 수아레즈가 복귀한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는 수아레즈의 2골로 승리를 기록했지만, 16강 진출에 유리한 국가는 무승부만 거두어도 올라가는 이탈리아였다. 우루과이는 승리를 위해서 맹공을 퍼부었지만 후반 80분에 다다를때까지도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그런데 정말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키엘리니와 수아레즈 모두 필드에 뒤엉켜 넘어진 것이다. 그 장면에 대한 리플레이에서 수아레즈가 키엘리니의 어깨를 이빨로 물어뜯는 모습이 포착됐다. 키엘리니는 즉각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주심에게 항의했지만,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한 주심은 키엘리니의 말만 믿고 수아레즈에게 퇴장을 줄 수 없었다. 결국 5분도 지나지 않은 코너킥 상황에서 우루과이는 고딘이극적인 헤딩골을 기록하며 16강에 진출했다.
수아레즈는 이 행동으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다. 차라리 주심이 이 장면을 목격해서 퇴장을 받았더라면 ‘4개월간 축구 관련 모든 활동 금지’ 와 같은 처벌은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조금 다른 입장이지만 이탈리아 또한 수아레즈가 퇴장 당하지 않은것에 대하여 아쉬울 것이다. 일단 이탈리아는 그 경기에서 마르키시오가 퇴장당하며 수적 열세를 안았다. 하지만 수아레즈 역시 퇴장당했다면, 10대10으로 다시 대등한 경기를 펼치게 되었을 것이고, 골장면에서 뒷공간에 있던 수아레즈를 마크하던 190cm의 보누치가 그 대신 고딘을 마크하였다면 골을 먹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랬다면 그들은 16강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14년 6월 30일, 만약에 로벤이 다이빙을 하지 않았다면?
멕시코는 개최국 브라질과 같은 조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경기력을 펼쳤지만,골득실에서 아쉽게 밀리며 A조 2위로 16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들이 조별리그에서 보여준 경기력이라면 충분히 8강도 노려볼 수 있었지만, 문제는 16강에서 B조 1위인 네덜란드와 상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예상외로 경기가 시작되자 밀어붙인 쪽은 멕시코였다. 계속해서 네덜란드를 몰아붙이던 멕시코는 결국 후반이 시작되자마자 지오반니 도스 산토스가 골을 기록하며 이변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규시간 종료 2분전 스네이더가 네덜란드의 코너킥 상황에서 튕겨나온 볼을 그대로 차넣으면서 기적적으로 네덜란드는 동점을 만들었다.
그렇게 정규시간은 마무리되고 연장으로 경기가 넘어 간다고 생각한 무렵, 아르연 로벤이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넘어졌고 주심은 즉시 PK를 선언하였다. 그런데, 방송사에서 보여준 리플레이는 로벤이 넘어지는 장면에서 수비수와의 별다른 접촉이 없었음을 확인할 수 없었다. 멕시코 선수들의 항의를 뒤로 하고 훈텔라르는 깔끔하게 PK를 성공시키며 멕시코의 희망을 눈물로 바꿔놓았다.
로벤은 이 경기가 끝난 후 본인의 다이빙을 인정하고 사과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분명히 PK가 선언될만한 상황이였다는 말 또한 덧붙였다. 네덜란드는 8강에서도 멕시코와 같은 북중미의 코스타리카와 만났다. 만일 멕시코가 올라갔더라면 월드컵 최초의 북중미에서 4강팀이 탄생하는 것이었다.
2014년 7월 5일, 만약에 실바가 경고를 받지 않았다면?
개최국 브라질은 16강전인 칠레와의 경기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며 힘들게 승리하였다. 반면에 다크호스로 뽑혔던 콜롬비아는 스타로 떠오른 하메스 로드리게스의 활약에 힘입어 우루과이를 2:0으로 깔끔하게 제압하고 8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우세한 쪽은 역시 개최국 브라질이였다. 브라질은 전반 초반부터 콜롬비아를 몰아붙이더니, 7분만에 팀의 주장인 티아고 실바가 선제골을 넣었다.
그러나 악몽의 시작은 후반 18분경에 벌어졌다. 프리킥 상황에서 공격가담을 했던 실바가 콜롬비아의 오스피나 골키퍼가 볼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진로를 방해하며 경고를 받은 것이다. 다행히 콜롬비아와의 경기에선 2:1로 승리하였지만, 결국 그 경고로 인해 수비의 핵인 실바는 독일전에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나비효과’ 처럼 실바의 이 불필요한 경고 한장은 ‘미네이랑의 대참사’ 로 이어졌다. 물론 네이마르 역시 콜롬비아전에서 허리 부상을 입으며 독일전에 결장하기는 했지만, 7실점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실바의 결장이였다. 특히 독일전 7실점이 기량 문제보다는 브라질 선수들의 멘탈이 완전히 파괴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는 것에서 비추어 볼때, 동료들을 다독여 줄 수 있는 그의 결장은 너무나도 뼈아팠다. 만일 그가 불필요한 반칙으로 경고만 받지 않았더라면 브라질은 12년만의 우승이자, ‘마라카낭의 비극’을 날려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2014년 7월 14일, 만약에 메시가 결승전에서 골을 넣었다면?
저번 남아공 월드컵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메시는 이번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3경기에서 모두 득점을 기록하며 축구의 전설이 되기 위한 마지막 퍼즐인 월드컵 우승을 위해 순항하는 듯 하였다. 토너먼트에선 조별리그와 같은 활약을 펼치진 못하였지만, 어찌됬든 아르헨티나를 결승에 올려놓은 1등공신은 역시 리오넬 메시였다. 이제 그가 진정한 축구의 신, 전설이 되기 위해선 단 1승만이 필요하였다.
전반전부터 열심히 뛰어다닌 메시는 후반전이 시작한지 1분만에 완벽하게 독일의 수비라인을 깬 뒤, 노이에르와의 1대1 기회를 맞이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그의 왼발을 떠난 슈팅은 골문을 종이 한장 차이로 벗어나고 말았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연장 후반에 괴체에게 골을 허용하며 준우승에 머무르게 되었다. 메시의 대관식도 4년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메시는 월드컵 우승빼곤 정말로 완벽한 선수였다. 클럽에서의 기록은 이미 펠레와 마라도나를 뛰어넘은지 오래였고, 월드컵 우승만 차지한다면 아마 우리가 죽기 전까지 메시와도 같은 선수를 보지 못하였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