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니에스타, 바르셀로나 연대기
상태바
이니에스타, 바르셀로나 연대기
  • 최원준
  • 발행 2018.04.28
  • 조회수 4659
이 콘텐츠를 공유합니다
w
이니에스타, 바르셀로나에서의 8가지 이야기

또 하나의 전설이 떠난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가 바르셀로나를 떠난다. 이니에스타는 27일 공식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시즌이 내 마지막 시즌이다"며 바르셀로나와 결별한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이번 시즌이 바르셀로나에서 뛰는 마지막 시진이 될 것이며 팀 동료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한다"고 밝혔다.

이니에스타는 바르셀로나 유소년 출신으로 지난 2002년 1군에 데뷔해 줄곧 바르셀로나 한 팀에서만 뛰었다. 이제 그는 긴 시간을 뒤로 하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1. 가장 싫어했던 클럽에 입단한 어린 소년

스페인 남동부 알바세테 출신의 한 어린 소년은 축구를 좋아했다. 고향의 '알바세테 발롬피에'에서 축구를 시작한 소년은 재능이 있었고, 본격적으로 축구를 배우기 위해 더 큰 클럽으로 이적을 준비했다. 처음으로 입단 테스트를 치르기로 예정된 팀은 FC바르셀로나의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 CF 였다. 하지만 당시 레알 마드리드 CF 유스 팀 훈련소 근처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다른 클럽에서 테스트를 보게 된다. 그 클럽이 바로 '바르셀로나'였다. 12살의 나이에 바르셀로나에 입단하게된 소년은 사실 FC바르셀로나를 싫어했다. 자신의 고향 팀인 알바세테에게 항상 큰 점수차로 패배를 안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단 후 바르셀로나에 애정이 생긴 이니에스타는 훗날 팀의 전설이 된다.

 

2. 착실했던 천재의 데뷔, 녹록치 않던 주전경쟁.

12살 수비형 미드필더로 입단한 이니에스타는 몸의 벨런스와 공을 다루는 기술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공격적인 재능을 더 살릴 수 있도록 공격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바꾸게 된다. 유소년 코스부터 차곡차곡 밟아나간 이니에스타의 실력은 이때부터 급속히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2002년 루이스 판 할 감독에 의해 챔피언스리그에서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하지만 당시 바르셀로나에서는 네덜란드 멀티플레이어 필립 코쿠, 패스마스터 사비, 루이스 엔리케 등 스타 플레이어가 즐비했고 경험이 부족했던 어린 이니에스타는 이들과 함께 경쟁 할 수 없었다.

3. 유망주 딱지를 벗겨내다.

주전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이니에스타는 04/05 시즌 레이카르트 감독의 신임을 받으며 꽤 많은 리그경기에 출전기회를 부여 받는다. 당시 이니에스타는 무리한 개인기와 볼을 처리하기 하기 어려운 지점에서 슈팅을 시도하면서 잦은 실수를 저질렀다. 지금 플레이를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이야기다. 이때만 해도 그는 팀의 유망주였다.

그 다음 해인 05/06 시즌 이니에스타의 기량이 만개하기 시작한다. 사비의 부상으로 기회를 잡은 이니에스타는 점점 바르셀로나에 어울리는 선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이니에스타의 이름이 축구팬들에게 알려진 경기가 치러진다. 바로 챔피언스리그 4강 AC밀란과의 경기다. 당시 산시로에서의 경기에 AC밀란의 우세를 점치는 사람이 많았다. 더군다나 바르셀로나는 데쿠의 부상으로 공백을 메우지 못할 것이란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젊은 미드필더 이니에스타는 데쿠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웠다. 그 어렵다는 산시로 원정에서 지울리의 득점을 도와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이 경기로 사람들은 유망주 딱지를 벗겨낸 이니에스타에게 점차 주목하기 시작했다.

4. 등번호 8번. 다재다능한 미드필더

06/07시즌 이니에스타는 등번호 8번을 부여받는다. 이제 팀의 주축으로 인정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니에스타가 주전보장을 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에드밀손의 후계자로 영입된 야야 투레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니에스타는 확실한 주전미드필더 자리는 보장 받지 못했다. 야야 투레를 홀딩으로 두고 데쿠, 사비, 이니에스타가 로테이션으로 경기에 나섰다. 이때 이니에스타는 윙포워드 자리에서 반복되는 부상과 부진에 빠진 호나우지뉴의 공백을 메우기도 했고, 야야 투레의 부상에도 홀딩자리에 배치되며 다재다능함을 뽐냈다.

5. 티키타카 그리고 전성기

08/09시즌 레이카르트 감독이 떠나고 과르디올라가 바르셀로나에 부임한다. 티키타카의 시작. 역사에 남을 미드필더진이 완성된다. 카를레스 푸욜, 사비 에르난데스, 빅토르 발데스와 함께 팀을 이끈 아니에스타는 레알 마드리드의 리그 3연속 우승을 저지했고, 11년 만의 코파 델 레이 우승, 퍼거슨의 맨유와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는 에투에게 어시스트를 하면서 우승. 트레블을 달성한다. 결승전에서 뛰었던 루니는 이니에스타에게 세계최고의 선수라는 말을 남겼다. 이니에스타는 스페인 대표팀에서도 맹활약을 펼치며 2008년 유로 대회에서 스페인의 유럽대회 타이틀을 가져오게 된다.

6. 스페인에 3연속 메이저 우승을 선사하다.

2010년 FIFA 월드컵에서 7경기에서 모두 출전해 스페인의 사상 첫 우승을 만들어 냈다. 네덜란드와의 결승전. 연장 후반 세스크 파브레가스의 패스를 받아 극적인 결승골을 터트렸다. 득점 후 상의를 탈의 하고 다니엘 하르케를 추모하는 골 세레머니를 펼쳤다. 상의에는 "DANI JARQUE SIEMPRE CON NOSOTROS (다니엘 하르케는 항상 우리와 함께)" 라 적혀있었다. 이니에스타는 경고를 받았지만, 이 세레머니는 전 세계 축구 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2년 뒤 유로 2012에서도 전 경기에 출전해 스페인의 유로 2회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에서 공격포인트는 기록하지 못했지만 골 장면 마다 간접적으로 기여하면서 대회 MVP를 수상한다. 스페인은 유로 2008, 2010 월드컵, 유로 2012 3개의 메이저 대회에서 연속으로 우승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뤄냈다. 이 활약을 바탕으로 이니에스타는 2012년. 크리스티아노 호날두와, 리오넬 메시를 제치고 UEFA 유럽 최우수 선수에 등극했다.

7. 주장 이니에스타의 리더십, 캄프누의 기적

어릴 적 바르셀로나를 싫어하던 소년이 이제는 주장이 되었다. 함께 팀을 이끌던 푸욜과 발데스는 떠났고, 15/16시즌 사비 에르난데스까지 팀을 떠나게 되면서 주장 완장을 이어받았다. 함께 전성기를 이끌던 선수들이 모두 팀을 떠났지만 이니에스타는 남았다. 그리고 클래스는 여전했다. 프리메라리가 12라운드 시즌 첫 엘 클라시코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4-0 대승에 큰 도움을 세웠다. 이니에스타는 후반 31분, 무니르 엘 하다디와 교체될 때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기립 박수를 받았다. 산티아고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선수는 지금까지 호나우지뉴, 델 피에로, 토티, 이니에스타 단 4명 뿐이다.

그런 이니에스타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16/17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바르셀로나와 파리 생제르맹의 경기. 바르셀로나는 1차전에서 디 마리아의 활약으로 0-4 대패를 당한다. 바르셀로나가 8강에 가기 위해선 2차전에서 최소 4골이 필요했다. 챔피언스리그에서 지금까지 4골차 패배를 뒤집은 팀이 아무도 없었기에 아무리 바르셀로나라 해도 8강 진출은 어렵다는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이니에스타는 특유의 조용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팀을 이끌었고, 바르셀로나는 전반 3분 수아레즈의 골을 시작으로 공격을 퍼부으며 기적같은 승리를 가져오게 된다.

8. 유종의 미를 거두며 떠나는 레전드

챔피언스리그 8강전 로마에 패해 탈락하면서 이니에스타의 중국 슈퍼리그 이적설이 대두됐다. '아직 아무 것도 결정 된 것이 없다' 며 팬들을 안심 시켰던 이니에스타는 21일 바르셀로나 소속으로의 마지막 결승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세비야를 상대로 선발출전해 한 골을 터트리며 팀의 5-0 승리에 기여했다. 그리고 27일 기자회견을 통해 말했다.

"내 커리어가 FC바르셀로나에서 끝나는 상상을 해왔다. 하지만 더이상 내가 선발로 나서고, 타이틀을 딸 수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힘들었다. 인생 대부분을 보낸 FC바르셀로나였기에 결정이 쉽지 않았다"

그는 팀을 위해 자신이 사랑하던 팀을 떠나려고 한다. 앞으로의 그의 커리어도 지금처럼 빛나기를

 

출처 : 나무위키, FCB Classic pics, Iniesta트위터, sporf트위터, Barca Galaxy트위터, 유튜브 축구의왕 캡쳐

copy_cc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