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에 비해 꽃을 피우지 못한 비운의 천재, 조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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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에 비해 꽃을 피우지 못한 비운의 천재, 조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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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행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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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P.


축지라퍼's 한 줄

비운의 축구 천재


한국의 전 축구선수. 현 부산 아이파크 감독. 2017.10.10 심장마비로 하늘로 떠났다.
한 때 대한민국 최고의 유망주(데뷔 후 별명이 조르징요 였을 정도로 촉망받던 유망주였다.)로 각광받던 때가 있었으나 빛을 못보고 사라진 선수.

클럽 커리어


한양대 출신으로 촉망받던 유망주였던 조진호는 1994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포항제철 아톰즈에 입단하였다. 그러나 고질적인 무릎부상과 잦은 슬럼프에 시달리며 포항에서 6시즌동안 45경기 출장과 4골에 그쳤다. 2000년 부천 SK로 이적하여 17경기 2골을 기록하였고, 그 시즌 리그컵이었던 대한화재컵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2001년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하였으나 대부분 교체 출장에 그쳤고, 2002년 전방 십자인대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하였다.

단 한번의 실수로 커리어에 남은 오점
재능에 비해 꽃을 피우지 못한 비운의 천재


조진호는 대륜고등학교 재학시절 일찌감치 재능을 인정 받아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남북단일팀에 선발되었다. 당시 대표팀의 공격진은 대부분 북한 선수들이었지만, 서동원과 더불어 남한선수로는 유일하게 대표팀의 공격진을 이끌었으며, 대표팀의 8강 진출에 공헌하였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당시 최연소의 나이(18세 11개월)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 해당 월드컵 엔트리 최연소 선수로 포함되어 독일과의 3차전에 출전하여 위협적인 슛으로 주목 받았다.

1993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에 2회 연속 출전하였으며, 미국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되였다. 카메룬과의 월드컵 직전 두차례 평가전서 연속골을 기록하며 많은 주목을 받았었고, 조별리그 3라운드 독일전에 서정원과 교체로 출전하였으며, 구이도 부흐발트의 전담 마크맨으로 활약했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본선 출전하였지만,끝내 한국은 4강에서 떨어졌다.

1996년 아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이 야심차게 선임했던 외국인 감독 아나톨리 비쇼베츠는 한국 축구의 체질개선을 선언하였고, 좋은 체격조건을 가진 선수를 추구했던 탓에 단신이였던 조진호의 대표팀에서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조진호는 비쇼베츠 감독과 큰 갈등을 겪게 되었다.

1995년 다이너스컵 출전을 앞두고 비쇼베츠 감독의 기용방식에 불만을 품었던 조진호는 올림픽대표팀 합류를 무단으로 거부하며 논란이 일었고, 이에 대한 징계로 6개월 선수 자격정지를 당하고 말았으며, 그 기간동안 조진호는 축구팬들에게도 외면 받으며 잊혀졌다.

10월 10일 부산 아이파크 조진호 감독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R.I.P. 조진호
고인의 명복을 빈다.


출처 - 위키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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