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패 후에도 몸을 던져 얻은 1무에 울었던, 98 프랑스 월드컵썰
상태바
2패 후에도 몸을 던져 얻은 1무에 울었던, 98 프랑스 월드컵썰
  • 최명석
  • 발행 2017.07.05
  • 조회수 4457
이 콘텐츠를 공유합니다
w
98년 프랑스 월드컵의 기억. 나로선 태어나서 본 기억이 나는 두번째 월드컵이었다.

한국은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일본을 상대로 도쿄대첩을 거두는 등 아시아의 호랑이로 무난하게 월드컵에 진출한다.




 


세계의 벽은 높았고(높은지 몰랐음) 축구 변방이었으나(아시아에선 호랑이) 당시 분위기는 그래도 한번 해볼만하다! 역대 최강의 멤버다!는 얘기가 나왔다.

(늘 그렇듯 역대 최강의 멤버라는 얘기는 항상 나오는 것 같다)

 

조추첨 결과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 E조에 편성되었다.

"별로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할 것도 없다"라는 기사도 나왔었다.

모든 언론과 국민들의 기대는 역대 최고치에 달해있었다.

 



 


감독은 심지어 차붐!

 



 


"차범근을 대통령으로"라는 구호까지 나왔으니, 우리 국민들은 유재석, 김연아, 손석희 등 좀 한다 싶으면 대통령으로 하자는 얘기를 잘 하는듯

 



 


아시아지역 예선 득점왕을 차지한 독수리 최용수, 94월드컵의 실패를 만회하겠다는 황선홍, 불세출의 골키퍼 김병지, 94월드컵에서 수비수임에도 2 골을 넣으며 세계적인 리베로로 떠올랐던 홍명보, 왼발의 달인 하석주, 앙팡테리블 고종수 등 선수층은 그 어느때보다 화려했다.

그런 기대속에 복선이었을까, 황선홍이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을 당한다.

(황선홍은 출중한 기량에도 불구하고 94년도 볼리비아전에서 많은 찬스를 날려먹었고, 98월드컵 예선에선 엔트리에도 없었는데, 뒤늦게 합류했으나 부상까지 당하며 2002년 전까지 욕을 무지하게 먹었다. 2002년 월드컵은 황선홍에겐 이미지를 바꿀 마지막 기회였던 셈)

 



 


본선 최종 엔트리

감독 : 차범근(경질 후 김평석 대행)
GK : 김병지(울산), 서동명(상무)
DF : 이임생(부천), 최영일(부산), 이민성(부산), 이상헌(안양), 김태영(전남), 장형석(울산), 장대일(천안), 홍명보(벨마레 히라츠카;일본)
MF : 최성용(상무), 유상철(울산), 김도근(전남), 노정윤(NAC 브레다;네덜란드), 고종수(수원), 이상윤(천안), 하석주(세레소 오사카;일본)
FW : 김도훈(비셀 고베;일본), 최용수(상무), 서정원(RC 스트라스부르;프랑스), 황선홍(포항), 이동국(포항)

 



 


월드컵 첫승을 목표로한 대한민국.

이때까지만해도 우리나라는 월드컵에서 첫 승을 해본 적도, 16강은 꿈도 못꿨고, 선제골도 넣어본적이 없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갑자기 4강에 간 것은 그야말로 모든 천운이 맞아 떨어진 기적이었던 것. 우리는 확실히 세계 축구 변방이었다.

 



첫경기는 북중미 최강자, 멕시코

 



 


시작은 좋았다. 하석주의 프리킥 선제골. 이 득점은 우리가 월드컵 본선에서 최초로 기록한 선제골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백태클로 퇴장....
당시 백태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피파가 언급했었는데, 하석주는 그 시범케이스가 됐다.
결국 3골을 내리 먹히고 3대1로 진다.

이날 경기에서 짜증이 났던건, 멕시코의 블랑코가 다리 사이에 볼을 끼우고 선수들 사이를 점프해서 피해나가는 기술을 몇번이나 썼다는 것. 일명 쿠아테미나 혹은 게임에선 블랑코 바운스라고 불리는 그런 기술을 보임으로서 우리 선수들과 국민들에게 허탈감을 더 크게 만들었다.

 



11번 블랑코. 아 진짜.. 나이먹고도 축구 잘하더라는... 뭔가 막기 힘든 유형의 이상한 스타일이었다.


MBC 아나운서 송재익은 "아~ 저 짓을 또하는군요!"라고 중계했다

이날 컨디션이 좋았던 고종수를 교체아웃 시키고, 최종예선에서 날아다녔던 최용수를 출전시키지 않은 점, 부상당한 이상윤을 풀타임 뛰게 하고 원톱으로 나선 김도훈은 다리에 쥐가나서 벤치에서 피를 빼고 가는 등 정상적이지 않은 벤치운영도 한몫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경기 후 기다렸다는 듯이 국내 언론은 마녀사냥을 시작했다. 하석주는 구국의 영웅에서 망국의 역적으로 변했다.

 



 


나넣고
점이나
다니


- 경기 후 한 PC통신 유저가 축구 게시판에 하석주 이름으로 지은 3행시.

 

두번째 경기는 네덜란드

막강한 멤버의 우승후보였던 네덜란드의 감독은 히딩크였다.

 





국내 언론은 네덜란드와 비기고, 벨기에를 잡자는 이야기가 많았고, 심지어 이길 수 있다는 기사도...
물론 희망을 가지는 것은 좋은것이었지만, 당시에는 해외축구가 활발히 중계되고 있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은 네덜란드라는 나라 자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내 기억으로는 kbs에서 라리가 중계를 해줬었는데 그때 봤던 바르셀로나의 클루이베르트 라던가 데 부어 형제, 오베르마스, 세도르프나 베르캄프 정도는 나도 알고 있는데.. 정말 이길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역시나.. 그래도 이렇게 질줄은 몰랐다..

그래도 밤새 열심히 졸아가며 응원했었던 기억이...

 



 


히바우두를 리발도, 다비즈를 데이비드, 호나우두를 로날도로 부르던 시절이었다. 98이후에 모든 발음이 바뀌게 된다.

"우리는 더 많은 득점을 할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의 골키퍼(김병지)가 너무 뛰어나서 더 많은 골을 넣지 못했다." - 1998년의 마르세유의 치욕 당시,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

 



 


그냥 기억나는건 이동국의 중거리 슛 밖에 없었다. 그리고 엄청났던 김병지의 선방..

 



 


경기가 끝난 후 아침, 모든 신문에는 이 제목이 걸렸다.
"세계의 벽은 높았다"

결국 차범근 감독이 모든 책임을 지고 경질된다.

"이번 경기를 끝으로 현 감독인 차범근을 전격 해임한다." - 대한축구협회
"차범근 감독의 전술은 이미 실패작 수준이었고 선수기용도 도저히 이해못할 고집스런 수준이었다." - 축구협회 기술위원

 





차범근 감독은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온다.....

 



모든 언론은 차범근을 폭격했다.
감독 경력 3년이 된 차범근에게 대표팀 감독을 맡겼다는 뒤늦은 비판이 나오기도 했고, 히딩크 또한 차범근 감독의 경험부족을 얘기했던 적이 있다. 아시아와 유럽 축구의 간극이 워낙 컸던 시기(지금도 크지만)였기에 초보 감독이 세계적 강호인 멕시코와 네덜란드를 상대로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어쨌든 책임을 진건지, 책임을 지운건지는 알 수 없지만...


 

차범근은 한국으로 돌아온다. 그 시절이 차범근과 그의 가족에게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라고 후에 얘기한다. 차범근의 가족에게도 비난을 했던 빠들이 그때도 많았다. 지금은 당시 '차범근 죽이기'가 과도했다는 여론이 많지만 이미 그당시에 차범근과 가족들은 지우기 힘든 상처를 받는다.

(차붐은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향하고... 많은 일이 또 있었지..)

16년 뒤 또 한국이 월드컵에서 그때와 같이 1무 2패로 탈락했는데도 불구하고 홍명보를 유임시킨다고 했을때, 차두리는 "그럼 16년전 아버지는 왜...?"라고 SNS에 썼다가, 차범근은 "그 입 다물라!"라 했다고 한다. 결국, 홍명보도 비난 여론 속에 결국은 떠나게 됐지만...

아무튼 우리 월드컵 역사에 가장 암흑기였다.
그리고 맞이한 마지막 벨기에전

차범근이 귀국한 후 마지막 벨기에전은 김평석 코치가 감독 대행을 했다.

유럽의 원조 붉은 악마, 벨기에

 



 


이 경기는 한국 축구역사상 가장 처절했던 경기 중 하나로 기억된다. 나도 보면서 눈이 시뻘게 지도록 울었던 기억이 난다.

말 그대로 혈투였다.


이임생은 피를 흘리며 머리에 붕대를 감고 뛰었고, 김태영도 무릎 부상을 당했지만 점프를 하며 공을 걷어냈다.

 



 


골넣고 역적이 되었던 하석주는 1경기 징계 후 다시 나온 후, 절묘한 프리킥으로 유상철의 득점을 도왔다. 최용수는 아쉽게 크로스바를 넘기는 헤딩을 두차례 선보이며 계속 욕먹을 거리를 만들었고, 그것이 2002년 월드컵까지... 그럴줄이야...

 



 


경기는 정말 치열했다. 이미 2무를 기록했던 벨기에는 이기지 못하면 16강 탈락이었다. 벨기에는 전원 공격에 나섰고 한국은 맨바닥에 온 몸을 던져가며 슈팅을 막았다. 후반 추가시간에 벨기에의 골키퍼까지 공격에 가담하며 공세를 퍼부었으나 결국 경기는 종료.

 



이 경기를 보고 울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듯.

참으로 다이나믹했던 98년 월드컵.

 



 


그때 대표팀의 축구란 우리에게 단순한 축구 시합 하나가 아니었던 시절.

 

 

 

 

 



copy_cc ND소프트